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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을 통해 살인을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삶의 에너지를 회복하는 이야기
1. 영화 개요
제목 : 이레셔널 맨 (Irrational Man)
장르 : 미스터리
감독 : 우디 앨런
주연 : 호아킨 피닉스, 엠마 스톤, 파커 포시
개봉 : 2015년, 미국
2. 줄거리
여름이 내려앉은 미국의 작은 대학 마을. 나무 사이로 햇살이 스며드는 캠퍼스, 차분하게 흘러가는 일상.
그곳에 한 남자가 도착한다.
*에이브 루카스.*
전설처럼 회자되던 철학 교수, 하지만 지금의 그는 삶의 열정도, 방향도 모두 잃은 채로 그곳에 서 있다.
에이브는 과거 전쟁 지역에서의 참상을 목격하고, 그로 인해 세상에 대한 신뢰와 철학에 대한 믿음마저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는 걸음마다 술 냄새를 풍기고, 강의 중에도 삶의 무의미함에 대해 읊조린다.
학생들은 그에게 매혹된다. 특히 *질 폴라드*라는 밝고 지적인 여학생은 그의 통찰력과 허무한 눈빛 사이에서 어떤 낯선 매력을 느낀다. 그녀는 점차 에이브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한편, 교수 동료인 *리타*는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서 에이브에게 위안을 구하려 하며 그와 은밀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에이브의 깊은 공허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는 철학을 말하지만 그 안에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진리는 없다. 삶은 무작위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 삶이 하나의 쓰레기 더미처럼 무너지고 있다고 느낀다.
어느 날, 질과 함께 카페에 앉아 있을 때.
에이브는 우연히 옆 테이블에서 어떤 여성이 격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녀는 가족 법정 판사에게 부당하게 당하고 있으며, 그 판사가 자신의 삶을 파괴했다고 토로한다.
에이브는 갑자기 멈춰버린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정지되어 있던 감정의 수면 아래에서 어떤 이상한 에너지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 세상은 불공평하다. 그런데 내가, 이 불공정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 순간, 그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철학은 나를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의 행동은 나를 구할 수 있다.”
그의 머릿속에는 '살인'이라는 생각이 뚜렷하게 자리 잡는다.
완전범죄. 정의를 위한 살인. 목적 있는 행위.
이 장면은 영화의 전환점이다.
삶에 무기력하던 철학자가 처음으로 명확한 ‘선택’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관객은 그의 광기와 열정, 논리와 불안 사이에서 흔들린다.
에이브는 철저하게 준비한다. 판사의 일상을 파악하고, 스케줄을 익히고, 독극물을 준비한다.
철학자답게 모든 행동에는 논리와 구조가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도서관에서 판사가 마시는 주스에 독을 타고, 그가 마시는 모습을 멀리서 조용히 지켜본다.
며칠 후, 판사가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흘러간다.
하지만 에이브의 내면에는 거대한 격류가 일고 있다.
그는 오랜만에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낀다.
식욕이 돌아오고, 술을 끊고, 강의가 흥미로워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생동감이 깃든다.
그의 삶은 돌연 부활한 듯 보인다.
“살인은 나를 도덕적으로 구원했다.”
그는 자신만의 윤리적 논리를 정당화한다. 그것이 선택된 존재만의 자율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놓친 것이 있었다.
'죄는 흔적을 남기고, 인간은 흔들린다.'
한편, 질은 점차 이상함을 느낀다.
에이브의 급작스런 변화, 판사 사망과의 이상한 타이밍, 그리고 그가 우연히 흘린 단어들.
그녀는 퍼즐을 맞추기 시작하고, 결국 에이브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녀는 그를 정면으로 추궁한다.
처음엔 부정하던 에이브는 이내 진실을 인정하고, 자신이 그 행위를 통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설명한다.
하지만 질은 그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살인으로 자신을 구했다는 당신의 철학은, 결국 도망일 뿐이에요.”
이 장면은 가장 처절하고도 철학적인 충돌이다.
이성과 윤리, 정의와 범죄, 사랑과 공포가 충돌하며, 둘의 관계는 무너진다.
질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말하고, 에이브는 점차 절망에 빠진다.
완전했던 논리는 무너지고, 정의의 얼굴을 한 그의 행동은 , 또 하나의 죄악으로 남게 될 운명이 된다.
궁지에 몰린 에이브는 질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뒤따라 올라가 그녀를 밀어 떨어뜨리려 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그가 실수로 자신이 난간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삶과 죽음, 행위와 대가, 논리와 우연의 이중구조 속에서 그는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덫에 걸려 추락한다.
그리고 질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난다.
그녀는 철학적 혼돈의 한가운데를 지나, 다시 일상의 빛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유일한 ‘합리적인 인간’은 그녀였는지도 모른다.
3. 특징
◐ 철학과 범죄의 교차점에 선 이야기 구조
『이레셔널 맨』은 실존주의 철학과 범죄 드라마의 외형을 섞은 하이브리드 장르다.
전통적인 철학적 담론인 도덕, 윤리, 목적론을 극 중 에이브 루카스라는 인물에게 투영시킨다.
동시에 철학을 통해 현실의 공허함을 증명하려는 냉소적 인간이다.
그가 살인을 ‘의미 있는 행위’로 정의하며 존재를 회복해 가는 과정은, 도덕과 목적 사이의 거리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적 장치로 작동한다.
철학은 이 작품에서 단지 말이 아니라 *행동의 토대이자 죄의 도구*가 된다.
◐ 우디 앨런 특유의 모랄 패러독스
우디 앨런은 늘 도덕과 이성,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을 이야기해왔다.
『매치 포인트』나 『범죄와 비행』처럼 『이레셔널 맨』에서도 “악을 저지른 자가 과연 처벌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중심에 있다.
이 영화의 모럴 패러독스는 단순한 도덕적 양심의 문제가 아닌, 철학과 실제 사이의 충돌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 미니멀한 연출과 서늘한 미장센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과장 없는 연출이 특징이다.
폭력이나 충돌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며, 긴장감은 정적과 심리적 침묵 속에서 누적된다.
카메라는 인물의 감정보다 행동과 공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오히려 관객이 감정을 추론하도록 만든다.
배경이 되는 대학 마을의 여름 풍경은 한가롭고 아름답지만, 그 안에 감춰진 살인의 음모와 인간의 불안은 더욱 도드라진다.
◐ 음악과 감정 리듬의 아이러니
사운드트랙으로 쓰인 재즈와 클래식은, 극의 어두운 주제와 묘한 감정적 긴장을 이루는 대조 장치다.
밝고 가벼운 음악은 살인 장면마저도 무심한 일상처럼 통과시키며, 관객에게 도덕적 거리감과 불편함을 동시에 부여한다.
이러한 연출은 사건의 무게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관객의 윤리적 해석에 더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4. 총평
『이레셔널 맨』은 살인을 다룬 스릴러이지만, 스릴보다 철학이 먼저 도착하고, 감정보다 논리가 먼저 뒤흔드는 영화다.
우디 앨런은 이 작품을 통해 한 인간이 무의미한 삶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조작하고, 그것을 어떻게 자기 구원의 수단으로 착각하는지를 고요히 조명한다.
에이브 루카스는 절망적인 지성인이었다.
그는 글을 쓰고, 사유하며, 강의하지만, 결국 삶의 본질 앞에서 실존적 빈틈과 냉소만을 되풀이하는 인물이다.
그가 우연히 들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살인을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삶의 에너지를 회복하는 구조는,
우리 모두가 어떤 ‘의미’에 굶주려 있다는 것, 때론 그 의미조차도 비이성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을 날카롭게 상기시킨다.
감독은 철학적 질문을 범죄라는 장르의 구조 안에 담는다.
"살인은 악인가, 아니면 목적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는가?"
에이브는 그 답을 자신의 방식으로 찾지만, 그의 논리는 끝내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완전성과 충돌한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은 왜 지속되고 있는가?"
우리는 그 질문에 철학으로 답할 수 있을까, 아니면 무의식적인 선택으로 버티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는 사건이 아니라 사유의 미로이며,
살인이 아니라 삶이라는 철학적 어둠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에 대한 사색이다.
그리고 그 미로 끝에 서 있는 관객에게 가장 사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왜 살아가고 있는가?”
『이레셔널 맨』은 무겁지만 매혹적이다.
말 없는 정적, 짧은 유머, 어긋나는 시선, 그리고 마침내 맞닿은 감정들이 만들어낸 이 작품은
철학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가장 섬세하게 풀어낸 스릴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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