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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의 잔재와 인간의 오만, 그리고 상실에 대한 비극적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
1. 영화 개요
제목 : 백인의 것 (White Material)
장르 : 드라마
감독 : 클레어 드니
주연 : 이자벨 위페르, 크리스토퍼 램버트
개봉 : 2009년, 프랑스
2. 줄거리
아침의 열기가 벌써 들판 위에 번지고, 붉은 흙먼지가 공기 속에 부유한다.
벌레의 울음이 이어지고,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의 잔향이 낮게 퍼진다. 열대의 공기 속에서 한 여자가 묵묵히 걷는다.
금발의 머리가 햇빛에 타고, 흰 셔츠가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는다. *마리아 바리*.
이 땅에서 커피 농장을 운영하는 백인 여성. 프랑스 식민의 흔적 속에 남은 몇 안 되는 백인 정착민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농장 ‘블루베리 커피 플랜테이션’을 지키고 있다. 이곳은 아프리카의 이름 없는 한 나라, 내전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다.
정부군과 반군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며, 아이들이 총을 들고 다니는 나라.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폭력의 소문을 무시한다.
“여긴 내 땅이야.” 그녀는 말한다. “이건 내 일이지, 전쟁 따위와는 상관없어.”
새벽마다 마리아는 낡은 트럭을 몰고 농장과 마을을 오간다. 커피를 따는 인부들이 도망쳤다.
정부군이 이 지역에서 백인 소유지를 불태운다는 소식이 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을 찾아다니며 다시 돌아오라 애원한다. 그녀의 손끝은 땅에 닿고, 커피 열매를 한 알 한 알 어루만진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생의 마지막 줄 같기 때문이다.
마을의 공기에는 불안이 스며 있다.
라디오에서는 반군의 사령관, ‘박쥐’가 부상당했다”는 소식이 흐르고, 정부는 모든 백인들에게 즉시 철수를 명령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출국 비행기를 거부한다. 남편 앙드레는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이다.
그는 현지 행정관에게 농장을 팔아넘기려 한다.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지만, 마리아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말한다. “이건 내 거야. 나의 흙, 나의 커피야.”
그 말속에는 오만과 집착, 그리고 어떤 필사적인 사랑이 섞여 있다.
그들의 아들 마누엘은 무기력하다. 젊고 창백한 백인 청년이지만, 자신이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의 눈은 허공을 본다. 어느 날 반군 청소년들에게 둘러싸여 폭행을 당한 뒤, 그의 시선은 무너져 내린다.
머리를 깎고, 상의를 벗은 채, 그는 미친 듯이 총을 들어 정부군의 검문소를 향해 달려간다.
마치 스스로 전쟁 속으로 녹아들려는 사람처럼.
농장은 점점 폐허로 변해간다. 커피 열매는 썩어가고, 마리아는 트럭에 커피 자루를 싣기 위해 혼자 분투한다.
노동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녀의 말을 거부한다. “총소리가 점점 가까워와요.” 그들이 말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한다. 들을 수 없다.
그녀에게 이 땅은 단순한 사업의 장소가 아니라,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한편 ‘박쥐’, 반군의 상징 같은 사내가 부상을 입고 숲 속을 헤맨다. 그의 군대는 패퇴했고, 아이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가 피투성이의 몸으로 길가에 쓰러졌을 때, 마리아가 그를 발견한다. 그녀는 아무 망설임 없이 그를 자신의 트럭에 태운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농장 창고에 숨긴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 물을 건네고, 붕대를 감는다.
밤이 내린다. 불안한 바람이 농장의 나뭇잎을 스친다. 총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앙드레는 현지 경찰에 체포되어 매를 맞고, 마누엘은 총을 쏘며 광기에 잠긴다. 그 사이 마리아는 여전히 커피 자루를 꾸린다.
트럭의 엔진은 덜컹거리고, 흙먼지는 그녀의 얼굴을 덮는다. 그녀의 표정은 피로에 젖었지만, 그 눈빛은 꺼지지 않는다.
“커피를 완성해야 해.” 그녀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린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의 의지 따위에 관심이 없다. 반군이 농장에 도착한다.
아이 병사들이 웃으며 담장을 넘고, 닭과 개들이 허겁지겁 달아난다. 그들은 창고를 발견하고, 그 안에 숨어 있던 ‘박쥐’를 본다.
그리고 한순간에, 그에게 총을 겨눈다. 아이들의 총성이 어둠을 찢는다. 그들의 영웅은 그렇게 쓰러진다.
마리아는 그 광경을 멀리서 본다.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커피 자루는 흩어지고, 그녀의 손에는 먼지만 남는다. 불길이 번지고, 농장은 불타기 시작한다.
붉은 연기 속에서 마리아는 무너진 창고의 문을 붙잡고 주저앉는다. 그녀의 얼굴은 그을음에 덮였고, 눈빛은 멍하게 흔들린다.
새벽이 온다. 총성이 멎은 자리, 잿빛의 하늘 아래에서 새소리만 들린다. 마리아는 홀로 트럭을 몰고 사막 같은 도로를 달린다.
옆자리에 아무도 없다. 창문 밖으로 건조한 바람이 휙휙 스쳐간다. 그녀의 시선은 멀리, 무너진 산맥을 향해 있다.
커피는 다 타버렸고, 그녀의 세계도 불에 삼켜졌다.
도로 끝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트럭을 세운다.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을 오래 비춘다. 더 이상 눈물이 없다.
그저 무언의 고집, 끝까지 남은 생의 잔향만이 있다. 멀리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오고, 하늘에는 먼지가 흩날린다.
그러나 마리아는 움직이지 않는다.
화면은 천천히 사라지고,
다시 아침의 빛이 밀려온다.
3. 특징
◐ 식민의 잔재를 응시하는 시선
《백인의 것》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주의의 잔재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주인공 마리아의 고집은 한 개인의 자존심이 아니라, 오랜 지배의 습관이 낳은 무의식적 우월감의 표상이다.
그녀는 이 땅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라 믿는다. 그 믿음이 무너질 때, 비극으로 끝난다.
◐ 감정의 폭발 대신, 정적의 긴장감
영화는 절규보다 침묵이 많다. 카메라는 인물의 눈빛과 숨결, 열기의 질감을 담아낸다.
마리아의 내면은 폭풍처럼 요동치지만, 그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은 더운 공기 속의 정적, 먼지와 빛, 그리고 그 사이의 무거운 침묵을 통해 서서히 절망을 체험한다.
◐ 색과 질감의 시적 구성
카메라가 포착하는 색은 대부분 붉은 흙, 하얀 햇빛, 그리고 희미한 청색의 섞임이다.
흰 피부 위에 덮이는 먼지, 붉은 흙 속에 묻히는 커피 열매, 타오르는 불길의 색감들이 영화 전체를 하나의 시적 구조로 만든다.
클레어 드니는 언어 대신 질감으로 감정을 말하는 감독이다.
◐ 이자벨 위페르의 초현실적인 연기
위페르는 분노와 슬픔, 광기와 냉정을 한데 겹쳐낸다. 그녀는 현실의 여자가 아니라, 거의 상징적 존재처럼 느껴진다.
한 문명과 한 시대의 잔재를 몸으로 연기하는 배우다.
◐ 종말의 서정
모든 것이 타버린 뒤에도, 마리아는 떠나지 않는다. 영화는 그녀의 몰락을 패배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문명이 사라지는 순간의 서정적 잔향으로 포착한다.
4. 감상문
영화가 시작될 때 먼저 공기의 냄새를 느꼈다. 타는 흙, 땀, 그리고 먼지의 냄새.
마리아가 트럭을 몰고 붉은 길을 달릴 때, 그 바람 속에서 그녀의 절망이 섞인 숨결이 들린다.
그녀는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무너진 세상을 부정하며 버티는 사람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동시에 잔인하게 느껴졌다.
《백인의 것》은 ‘소유’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는다.
마리아는 그 땅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해의 사랑이 아니라 지배의 사랑이었다.
그녀는 흙을 만지고, 커피를 따고, 노동자들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들의 삶과 공포를 끝내 느끼지 못한다.
그 거리감이 영화의 아픈 부분이다.
그녀는 이곳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떠날 수 없고, 그 모순 속에서만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불타는 농장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눈빛은 모든 문명의 종말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불에 타 사라질 때조차, 그녀는 “이건 내 거야”라는 마음을 놓지 못한다.
불타는 대지 위에서, 인간의 욕망과 고독이 한 줄기 열기로 남아 사라지는 순간,
그 고집이 너무 어리석어서, 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이라서 가슴이 저린다.
감독은 시간과 빛으로 절망을 조용히 쌓아 올린다.
총소리, 햇살, 트럭의 엔진, 커피 자루의 질감, 이 모든 요소가 마리아의 내면을 대신한다.
대사보다 공기, 사건보다 여백이 더 많은 영화다.
마치 먼지를 들이마신 듯, 목구멍이 마르고 가슴이 무겁다.
그녀가 사랑했던 것은 커피가 아니라, 자신이 이 세계에 의미 있게 존재한다고 믿게 해 준 착각의 흔적이다.
마리아가 끝까지 떠나지 못한 이유는 단순한 의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이 세계에 아직 존재한다고 믿고 싶었던 절박함 때문이다.
소유, 정체성, 고집, 사랑,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이 믿고 싶은 세계를 붙드는 방식이다.
이 영화는 한 여자의 몰락을 넘어, 인간의 ‘착각’에 대한 장송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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