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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언어도, 사람도 지워지던 시대. 존재하지 않는 말로 존재를 증명해 낸 한 남자의 이야기
1. 영화 개요
제목 : 페르시아어 수업 (Persian Lessons)
장르 : 드라마, 전쟁
감독 : 바딤 피얼먼
주연 :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라르스 아이딩어, 레오니 베네쉬
개봉 : 2020년, 러시아, 독일, 벨라루스
2. 줄거리
영화는 1942년, 독일 나치 치하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유대인 청년 *질 페렌츠*는 나치에게 붙잡혀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수용소로 향하는 길임을 직감하고 공포에 떤다. 트럭이 멈춘 후, 독일군은 죄수들을 한 명씩 불러 세우며 리스트에 따라 총살을 진행한다. 질의 차례가 가까워지자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누군가가 책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재빨리 “나는 유대인이 아니라 페르시아인이다!”라고 외친다. 독일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고, 질을 따로 데려가게 된다. 왜냐하면 수용소에서 일하는 독일 장교 중 한 명인 *코흐 대위*가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전쟁이 끝나고 테헤란에 가서 레스토랑을 여는 것이었다. 페르시아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질을 그에게 붙여주면, 의미 없는 총살보다 활용도가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질은 페르시아인이 아니라, 순수한 벨기에 유대인이라는 점이다. 그는 페르시아어를 단 한마디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피하기 위해, 그는 순간적인 거짓말을 이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질은 나치 수용소 안에서 페르시아어를 가르쳐야 하는 가짜 교사가 된다.
코흐 대위는 매일 질에게 와서 페르시아어 수업을 받는다. 질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밤마다 수용소에서 다른 죄수들의 이름을 외우고, 그 이름들을 조합해 가짜 언어 체계를 만들어 낸다. 마치 언어를 발명하듯, 단어와 문법을 조작해 코흐에게 가르친다. 예를 들어, ‘빵’이라는 단어는 어느 죄수의 이름 일부를 따서 만들어지고, ‘물’은 또 다른 이름에서 따온다. 질에게는 매 수업이 곧 생존을 위한 사투다.
코흐 대위는 의외로 열정적인 학생이다. 그는 매일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뜻을 적어가며, 발음을 반복한다. 그는 질을 신뢰하게 되고, 종종 그를 보호하기도 한다. 수용소 내에서도 질은 코흐의 페르시아어 교사로 알려지며 다른 죄수들에게도 특별한 존재로 비춰진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비밀은 언제든 들통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리게 만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질의 위치는 미묘해진다. 일부 죄수들은 그가 독일군과 가까워졌다고 질투하고, 고문관이나 다른 장교들은 그를 감시하며 수상하게 여긴다. 특히 독일군 장교 중 한 명인 *브라우너 중위*는 질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가 진짜 페르시아인이 아닌 것을 밝혀내려 한다. 그는 수업 중 질의 가르침을 유심히 관찰하며, 진짜 언어인지 확인하려 애쓴다.
질은 거짓말이 들킬 위기를 여러 번 겪지만, 놀라운 기지로 위기를 넘긴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장교들이 이란 출신의 포로를 데려와 질에게 대화해 보라고 시킨다. 질은 심장이 멎을 듯한 공포를 느끼지만, 이란 포로가 실제로는 쿠르드어 사용자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무마시킨다.
영화는 질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수용소 안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도 섬세하게 그려낸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죄수들, 소리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 작은 희망을 품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배신하는 자들까지. 그 속에서 질은 끊임없이 인간성과 양심, 그리고 생존 본능 사이에서 갈등한다.
어느 날, 코흐는 질에게 페르시아어로 ‘사랑’은 뭐라고 하냐고 묻는다. 질은 그 순간,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지만, 조용히 한 이름을 떠올린다. 죽어간 죄수 중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그는 그 이름을 말하며 “이게 사랑이라는 뜻이다”라고 설명한다. 코흐는 그 말을 곱씹으며 받아적는다. 이 장면은 거짓말 위에 쌓인 허구 언어가 실제 감정과 맞닿을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며, 수용소는 점점 혼란에 빠진다. 연합군이 다가오고, 독일군은 증거를 인멸하려 한다. 코흐 대위는 질에게 마지막 수업을 받으며, 그동안 배운 단어들을 복습한다. 그는 이제 수백 개의 가짜 페르시아어 단어들을 암기하고 있으며, 이를 정리한 수첩까지 만들어놓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첩은 실존하지 않는 언어를 바탕으로 한 ‘사전’이 된다.
연합군이 수용소를 해방시키기 직전, 코흐는 도망치려 하고, 질 역시 마지막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연합군의 개입으로 수용소가 해방되며, 코흐는 포로가 된다. 질은 자신을 고문하고 수많은 유대인을 죽인 독일군들에게 이제 증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
연합군은 코흐에게 범죄 사실을 묻는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부정하며, 죄수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질은 조용히 수첩을 꺼내 든다. 수첩 안에는 수백 개의 가짜 페르시아어 단어가 적혀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죽어간 유대인들의 이름이다. 그는 매 수업마다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냈고, 그 단어들은 곧 수많은 희생자의 이름으로 남은 것이다.
그 수첩은 역사 속에서 지워졌을지도 모를 이름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질은 진짜 언어를 가르치지 않았지만, 이름을 기억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보존해 낸 것이다. 이는 거짓말로 시작된 그의 ‘수업’이 결국 기억과 추모의 도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3. 특징
◐ 거짓말과 생존의 역설을 담은 서사
이 영화의 가장 중심적인 테마는 *거짓말*입니다.
주인공 질은 순간의 재치로 페르시아어를 할 줄 안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만들어가며 살아남습니다. 하지만 이 거짓말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기억의 수단이 되고, 인간성을 지키는 과정으로 확장됩니다.
결국, 주인공이 만든 가짜 언어는 죽어간 수많은 유대인들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것은 그들을 기억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진실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는 역설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 언어의 힘과 창조성
이 영화는 언어가 단지 소통 수단이 아니라, 생존의 무기, 정체성의 방패, 기억의 저장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질이 하나하나의 단어를 만들어낼 때, 그는 단지 허구의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 인간들을 기억 속에 보존하는 작업을 하고 있던 셈입니다.
이러한 창조성은 , 언어가 갖는 인간성의 근원을 들여다보게 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수용소 영화의 새로운 접근
「페르시아어 수업」은 전형적인 홀로코스트 영화와는 다릅니다.
유대인의 참혹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한 개인의 심리와 기지를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밀도 높은 서사를 택합니다.
수용소 내부의 폭력, 고통, 배신 등은 배경으로 깔리지만, 영화는 그것을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오히려 인물 간의 긴장감, 내면 변화, 권력 관계에 집중합니다. 이런 점에서 클래식한 전쟁 영화와는 차별화된 분위기와 깊이를 갖습니다.
◐ 압도적인 연기와 디테일
주인공 질을 연기한 *나윌 페레즈 비스카야르트*는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의 감정 표현, 두려움과 기지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기를 매우 섬세하게 해냅니다. 눈빛 하나, 말끝 하나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관객이 그의 처지를 함께 느끼게 만듭니다.
또한 코흐 대위 역의 *라러스 아이딩어*는 냉정함 속에서도 인간적인 욕망과 불안을 담은 연기를 펼쳐, 단순한 악역이 아닌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4. 총평
『페르시아어 수업』은 언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장 독창적인 전쟁 영화 중 하나입니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기억하고, 거짓말하며, 살아남는지를 섬세하게 조명합니다.
언어가 권력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생존의 무기가 되기도 하며, 결국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수단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감동적으로 그려냅니다. 질의 거짓말은 단순한 생존술이 아닌 하나의 저항이었습니다.
줄거리만 보면 단순한 ‘생존극’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기억의 윤리, 권력과 언어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고차원적 서사를 펼쳐냅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수백 명의 이름이 단어로 남아있다는 설정은 거짓말의 가치가 진실로 전환되는 기적의 순간으로, 많은 관객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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